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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회

법안 발의건수 17배 부풀리기

by 레몬컴퍼니 2025. 1. 3.

▣ 파산선고 등에 따른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률안(김현정)

국회에 발의된 법안 중에 형태가 일반 법안들과는 좀 다른 것이 있다. 보통 "~을 위한 ○○위원회 소관 ○○개 법률 일부개정을 위한 법률안"같은 형식이다. 말이 좀 어려운데, 이런 법안은 동일한 개정 내용을 수십개의 법안에 모두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런 법안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처리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피한정후견인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률 개정안(김도읍)

김도읍 의원은 2024년 8월 16일 하루에 9건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 법안은 모두 같은 내용이다. 피한정후견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여러 법률에서 규정된 '피한정후견인 결격사유'를 삭제하는 내용이다.

김도읍 의원

9건의 법안이지만 실제로 여기에 포함된 법률은 총41개다. 즉, 41개의 법률에서 피한정후견인 결격사유 조항을 삭제하는 법안이다.(참고로 이런 형태의 법안은 정부가 의원에게 법안발의를 의뢰하는 '청부입법'인 경우가 많다) 

김도읍 의원_피한정후견인 결격조항 정비법안

그렇다면 왜 같은 내용을 9건으로 나누었을까? 상임위원회별로 구분하기 위해서다. 법률 개정안 심사는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위원회별로 묶어줘야만 해당 상임위로 회부되어 심사를 원할하게 진행할 수 있다. 위 표를 보면 복지위, 농해수위, 정무위 등 상임위 별로 묶어 발의한 것을 볼 수 있다.

▶파산선고 등에 따른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률안(민주당 공동발의)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위원장 박주민)는 2024년 9월 3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파산선고를 받으신 분의 사회복귀를 위한 길을 열겠다"며 파산선고에 따른 결격 조항 정비를 위해 법률개정안을 공동발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에 따르면, 파산선고된 사람이 245개 법률에 따라 287개의 자격제한을 받고 있는데,  파산·회생 제도의 취지가 경제적 재출발을 돕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자격제한은 부당하다. 따라서 국회 정무위, 법사위 등 각 상임위에서 파산선고자들의 결격 조항이 담긴 법률을 일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기자회견_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법안_공동발의

기자회견을 전후하여 민주당은 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률개정안을 17건 발의했다. 위원회별로 해당 법률을 묶어 개정안을 발의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17건이지만, 실제 내용으로 보면 총 202건의 법률을 개정하려는 것이다.

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법안 발의현황_민주당 공동발의

일부 법안은 위원회별로 2건이 발의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같은 위원회라 하더라도 소위원회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예를 들면 국토교통위원회의 경우 국토 관련 소위와 교통관련 소위로 나뉘는데, 법안 심사는 국토/교통 소위에서 따로 진행된다. 법안 심사의 편의를 위해 소위 기준으로 묶어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파산선고 등에 따른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률안(김현정 의원 발의)

김현정 의원은 2024년 12월 30일 하루에 총 17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모두 정무위원회 소관 법안이다. 재미있는 것인 이 17개의 법안 내용이 모두 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법안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위원회별로 묶어 발의한 법안과 같은 내용이다.

김현정 발의_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법안1_출처: 잠자는 국회
김현정 의원
김현정 발의_파산선고 결격조항 정비법안2_출처: 잠자는 국회

앞서 김용만 의원은 '파산선고 등에 따른 결격조항 정비를 위한 정무위원회 소관 4개 법률 일부개정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개정이 필요한 4개의 법률을 묶어 1건으로 발의했다. 그런데 김현정 의원은 '~정무위원회 소관 17개 법률 일부개정을 위한 법률안' 1건으로 발의하면 될 것을, 굳이 17개의 개별법안으로 나누어 발의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김용만 의원의 발의 건수는 1건이고, 김현정 의원은 17건이 된다. 만약 이 법안이 모두 처리된다면 김용만 의원의 처리실적이 1건 증가하는 반면, 김현정 의원은 무려 17건의 법안을 처리한 것으로 집계된다. 김현정 의원은 1건으로 발의 가능한 법안을 17배 부풀려서 발의한 것이다.

법안 발의건수 17배 부풀리기

▣ 국회의원 입법활동 '건수' 평가의 허무함

지금까지 우리는 국회의원의 입법 의정활동을 '건수'로 평가해왔다. 법안 발의 건수, 처리 건수로 열심히 일하는 의원과 그렇지 않은 의원을 구분했다. 그런데 이번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국회의원 입법활동을 건수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방식이고 나아가 대단히 잘못된 방식이다. 건수가 아니라 내용으로 평가해야 한다. 김현정 의원의 사례처럼 은근슬쩍 법안발의 건수를 늘리려는 꼼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2025년 새해에는 국회의원들이 건수를 늘리기 위해 법안 발의를 남발하는 관행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