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안 심의 관련 '헌법'과 '법률'
예산안 자동부의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산안 심사와 관련된 「헌법」과 「국회법」의 규정을 대략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관련 조문은 아래와 같다.
[헌법] 제54조
①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
②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
[헌법] 제57조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헌법] 제56조
정부는 예산에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여 국회에 제출할 수 있다.
헌법에서는 국회의 예산안 심의를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 1일 0시)까지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의결된 예산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대신 헌법 제57조에서 정부가 예산을 증액할 때에는 정부의 동의를 받도록 하여 국회에 견제장치를 두었다.(※국회의 예산 감액에 대해서는 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
[국회법] 제85조의3(예산안 등의 본회의 자동 부의 등)
① 위원회는 예산안등과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의 심사를 매년 11월 30일까지 마쳐야 한다.
② 위원회가 제1항에 따른 기한까지 심사를 마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그 다음 날에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치고 바로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본다. 다만,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정부가 제출(매년 9월 1일)한 예산안은 소관 상임위에 회부되어 예비심사를 하고, 그 결과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위)에 회부된다. 예결위에서는 종합정책질의, 부별 심사 등을 거쳐 표결한다. 다만, 제한된 시간 내 효율적 심사를 위해 통상 15명 내외로 구성되는 ‘예산안 조정소위원회’에서 예산안의 세부내역을 심사하는게 관례다. 문제는 예결위가 정해진 기한에 심사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인데, 「국회법」은 헌법에서 정한 시한을 맞추기 위해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위원회가 11월 30일까지 심의를 마치지 못하면 예산안은 12월 1일 0시를 기해 본회의에 부의된다. 본회의에 상정하여 처리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고, 이 때 자동부의되는 예산안은 정부(안)이다.
▣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는 언제 생겼나?
2012년 5월 2일에 여야 합의로 통과된 국회법 개정 법률에 따라 예산안 자동부의제도가 도입되었다. 소위 '국회 선진화법'으로 알려져 있는 그 국회법이다. 국회에서 쟁점 안건에 대해 극한대결과 물리적 충돌이 일상화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개선방안이 도입되었는데, 예산안 처리 방식도 그 중 하나였다. 다른 국회 선진화 방안은 2012년 5월 30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는 2014년 5월 30일 부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2014년에 제출된 2015년도 예산안 심의부터 이 제도가 적용되었다.
▣ 예산안 자동부의제도 도입 효과는?
도입 이전에 비해 예산안의 본회의 의결 일자가 조금 빨라지긴 했다. 2015·2016·2017년도 예산안과 2021년도 예산안은 사실상 법정 처리시한 내에 통과됐다.
예산안이 자동부의 된다는 것이 곧 예산안 처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의사일정 작성권한을 가진 국회의장의 판단에 따라 예산안의 본회의 상정 및 처리를 미룰 수 있다.(2025년도 예산안도 우원식 국회의장이 12월 10일까지 합의할 것을 요구하며 12월 2일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산안 자동부의제도가 있으나마나 한 것이냐? 꼭 그렇지는 않다. 위 <표>를 보면 법정 처리시한을 준수하지 못하더라도 12월 10일 정기국회 종료 이전에는 대체로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산안의 지연처리 관행이 상당부분 개선된 것은 맞다.
▶예결위의 대정부 협상력 약화
예산안의 처리 일자는 좀 당겨졌는데, 예산안에 대한 국회 예결위의 대정부 협상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예산정국에서 정부는 예산 편성권을, 국회는 심의권을 갖는다. 정부와 여당은 가급적 원안을 고수하려 하고, 야당은 정무적·정책적 전략에 따라 예산안 수정을 요구한다. 이 때 국회의원들의 민원성 예산도 최대한 담으려고 한다. 자동부의제도 도입 이전에는 정부(기재부)가 국회(예결위)의 예산안 수정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가급적 빨리 예산안을 통과시키려 했지만, 자동부의 도입 이후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합의가 안되도 어짜피 12월 1일이면 자동으로 부의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산정국에서 정부·여당에 대한 야당의 협상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감소되었다. 이번에 야당 주도로 예산안 자동부의제도 자체를 폐지해버린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예산안 자동부의제 폐지 법률
지난 11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개정 국회법을 통해 예산안 자동부의제를 폐지했다.
현행 국회법 | 11.28일 개정 국회법 |
제85조의3(예산안 등의 본회의 자동 부의 등) ① (생 략) ② 위원회가 예산안등과 제4항에 따라 지정된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체계ㆍ자구 심사를 위하여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법률안을 포함한다)에 대하여 제1항에 따른 기한까지 심사를 마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그 다음 날에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치고 바로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본다. 다만,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제85조의3(예산안 등의 본회의 부의 등) ① (생 략) ② 의장은 제1항에도 불구하고 위원회가 예산안등과 제4항에 따라 지정된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체계ㆍ자구 심사를 위하여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법률안을 포함한다)에 대하여 제1항에 따른 기한을 경과하여 심사 중인 경우에는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하여 예산안등과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을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
개정 국회법은 현행 국회법의 자동부의 관련 조문을 삭제하고, 예산안 법정처리 시한을 경과한 경우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를 통해 본회의에 부의하도록 했다. 2012년 국회 선진화법 이전의 방식으로 되돌린 것이라 보면 된다.
▶2025년도 예산안 야당 단독처리
민주당은 11월 29일 예결위에서 정부 예산안 중 예비비 2조4,000억 원과 대통령실·검찰·감사원·경찰청 등 권력기관의 특별활동비(특활비)를 전액 삭감한 4조1,000억 감액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사상초유다. 그리고 본회의 상정을 공언했다.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일부 예산을 감액하고 필요 예산을 증액하려면 정부 동의가 필요한데, 만약 증액안에 합의가 안되면 예산안 자동부의제도에 따라 정부안이 회부된다. 일단 정부예산안이 본회의에 회부되면 시간은 정부·여당 편이다. 절대 다수인 야당이 반대하면 예산안 통과는 불가능하지만, 예산안을 처리 안해주고 버티면 아무래도 여론은 '야당의 예산안 발목잡기'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부담을 차단하기 위해 예결위에서 아예 증액을 포기하고 (정부동의가 필요없는)감액만 단행하여 의결했다. 그리고 (여당이 수용하기 곤란한 예산안을)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야당으로서 예산안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벼랑 끝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예산안 자동부의제도'가 없었다면 민주당은 다른 방식의 전략을 구사했을 것이다.
▣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할까?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를 폐지한 '개정 국회법'은 바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로 이송되어 대통령이 이를 공포해야 시행되는데, 현재로서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예산안 자동부의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집단은 여당도, 야당도 아닌 기재부였다. 이 제도 덕분에 기재부는 예산 정국에서 늘 '갑'의 지위를 누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권의 예산 수정 요구에 대해 "배째라"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기재부가 이 제도의 폐지를 그냥 '강건너 불구경' 할 리 없다. 그건 그렇고, 이번 예산안을 들러싼 여야의 극한대결 속에는 '정책'과 '민생'이 완전히 빠져있다. 정치적 유불리와 정쟁만 있을 뿐이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참 답답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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