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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발의

법제처와 국회의 협치사례

by 레몬컴퍼니 2025. 3. 28.

국회가 정부와 협치가 안된다고 난리인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아주 협치가 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법제처와 국회의원의 협치 사례를 보자. 김태선 의원이 2025년 3월 20일 하루에 20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 제목은 다르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각 개별법의 '이의신청'에 관한 내용을 「행정기본법」과 통일시키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누가 만들었을까? 법제처가 만든 것이고, 발의만 김태선 의원이 한 것이다. 국회의원과 법제처의 협치다. 이 분석을 하는 이유는 "법안을 많이 발의한 의원이 열심히 일하는 의원이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법제처와 국회의원의 협치사례

▣ 김태선 의원 발의 법안 20건 현황

아래 <표>는 김태선 의원이 3월 20일 하루에 한꺼번에 발의한 법안이다. 무려 20건이다.

김태선 의원

기재위, 행안위, 농해수위, 법사위, 복지위 등 소관 위원회도 다양하다. 그런데, 20개 법안의 취지와 내용은 동일하다. "개별법상 이의신청에 관한 규정을 「행정기본법」 내용에 부합하도록 통일적으로 정비"하는 법안이다.

연번 법안명 대표발의 발의일자
1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김태선 2025년
3월 20일
2 친환경농어업 육성 및 유기식품 등의 관리·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3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4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5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일부개정법률안
6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7 지방공기업법 일부개정법률안
8 변호사법 일부개정법률안
9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
10 공공단체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11 축산법 일부개정법률안
12 지역농산물 이용촉진 등 농산물 직거래 활성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13 외국환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
14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
15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16 사료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
17 동물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
18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19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20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

▶행정기본법이란?

「행정기본법」(2021. 3. 23. 제정·시행)은 행정의 원칙과 기본사항을 규정하는 법이다. 행정의 민주성, 적법성, 효율성을 위한 법률이다. 행정에 관하여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행정기본법」에 따라야 한다. '이의신청'의 경우를 보자.

'이의신청' 제도는 국민이 행정청 처분의 위법성이나 부당성을 제기하여 신속하게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행정기본법」에서는 이의신청 청구기간을 처분일로부터 30일 이내, 행정청 처리기간 및 연장기간은 각각 14일과 10일 이내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행정절차를 다루는 개별법에서는 '이의신청' 대신 ‘재심사’, ‘재검사’, ‘재심’ 등 다른 용어를 쓰기도 하고, 이의신청 청구기간이나 처리기간을 「행정기본법」보다 짧게 정하는 등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행정기본법」을 기준으로 이의신청에 관한 개별 법률의 내용(용어, 기간 등)을 통일성있게 정비해야 한다. 보통 이를 법령정비 또는 행정법제정비라고 부른다.

김태선 의원이 발의한 20건의 법안은 모두 이런 법령정비 또는 행정법제 정비를 위한 법안이다. 당연히 필요한 법안인데, 실질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법안은 아니다.

▣ 20건의 법안은 누가 만들었을까?

김태선 의원이 발의했으니 김태선 의원이 만들었겠지? 아니다. 이런 법안은 절대로 국회의원이 직접 만들지 않는다. 국회의원 입장에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 누가? 법제처가 만든 것이다. 원래 법제처가 할 일이다. 발의만 국회의원에게 시키거나 부탁하는 것이다. 법제처가 법령정비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연구용역 발주

법령정비는 어려운 일은 아닌데 양이 많고 귀찮은 일이다. 공무원들이 직접 하지 않는다. 이럴때 보통 동원하는 방법이 용역이다. 법제처는 2024년 6월 26일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입찰 공고>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공고명: 행정기본법상 국민권리구제 제도의 실효성 확보를 위한 법령 정비 방안 연구
  • 계약방법: 제한경쟁입찰
  • 사업금액: 3천만원
  • 납품기한: 계약체결일로부터 90일
  • 수요기관: 법제처
  • 사업목적: 국민들이 권리구제 수단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개별법 상 이의신청의 법적 성격 및 행정기본법과의 관계를 검토하고, 처분결과 통지 시 처분서 서식에 이의신청 방법, 절차 등 안내 문구를 추가하는 등 법령 정비 및 입법모델 제시를 통해 국민 권리구제 실효성 확보

②용역 결과 납품

이 용역은 사단법인 한국행정법학회가 수행했다. 제출일은 2024년 11월이다. 아래 <그림>의 목차에서 보듯이 개별법상 이의신청 제도의 법령정비 방안까지 정리해서 납품했다.

법제처 연구용역_행정기본법 관련 법령정비 방안

아래 <그림>은 이 용역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다. 개별 법령 중에서 '행정기본법이 정한 청구기간보다 짧은 기간을 청구기간으로 규정한 법령'을 정리한 것이다. 이런 불일치 사례에 대해 개별법령의 기간을 조정해서 「행정기본법」과 맞추는게 법령정비 사업의 목적이다.

법제처_법령정비용역 결과_일부발췌

빨간색으로 확대한 법률은,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김태선 의원이 발의한 법률 개정안이다. 이 말은 법제처가 법안을 준비해서 김태선 의원에게 발의하도록 했다는 의미다.

③용역 결과를 토대로 한 법률 개정

법제처가 어떻게 김태선 의원에게 전달했을까? 그건 모른다. 직접 가져다 주었는지, 당을 통해 전달했는지 알 수 없다. 김태선 의원이 발의한 법안 말고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 걱정 안해도 된다. 나머지도 누군가가 다 발의한다.

행정법제 혁신을 위한 법안_발의현황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보다 보면 위 법안들처럼 "행정법제 혁신을 위한~" 어쩌구 법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법안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발의된 법안으로 보면 된다.

박성민_조은희_최형두_권영진 의원

국회의원들은 왜 이런 법안을 받아서 발의할까? 법안 발의 및 처리 실적을 늘리는데 아주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 국회의원 법안 발의 '건수'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법안을 많이 발의한 의원이 열심히 일하는 의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정당에서 국회의원의 공천 여부를 결정할 때 임기 중 몇 건의 법안을 발의했는지를 평가하기도 한다. 황당한 일이다. 위의 사례처럼 법안 발의 건수가 아무리 많아도 질적으로 무의미한 법안이 많다. 이 분석은 법안발의 건수로 의원을 평가하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자는데 있다.

▶법령정비는 누가 해야하나?

법령정비를 위한 법안 제출은 법제처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국회의원은 이런 법안 발의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진짜로 필요한 법·제도적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단 하나라도 말이다.